세사미 도넛, 김진웅씨
- sdkoreanmagazine
- 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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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웅 씨 이민 이력서중앙대 정치학과 ROTC 2기 생 출신 정치인 꿈 이루려 미국 왔으나 이웃에게 받은 사랑 돌려주는 꿈만 남아 36년된 <세사시 도넛> 전국 6위 도넛샵 23년 경영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견되는 세사미 도넛과 크리스피 크림 전
여든넷 나이에 23년간 함께 한 마지막 비즈니스를 정리했다. ‘세사미 도넛’ 가게를 판 것이 지난 2월이다. 이제는 이민자로서 치열했던 삶을 털어버리고 남은 시간을 가족과 이웃을 위해 더욱 소중하게 쓰기로 했다.
주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김 진웅, 경실 씨 부부의 ‘세사미 도넛’. 1989년 카멜 마운틴 지역 지금의 자리에서 문을 열었고 김 씨 부부가 2002년, 당시 13년 된 이 가게를 사들여 장사를 시작했다.
2016년 ‘세사미 도넛’을 격려하기 위해 한인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았다. 당시 본국의 TV 등에서도 세사미 도넛에 대해 보도가 돼 약 100만명이 한국인들이 시청을 했다고 한다.
이웃들의 사랑과 배려 속에서 퍽이나 행복했던 동네 장사였다. 2016년 거대한 도넛 전문 체인점인 <Krispy kreme>이 같은 몰 안의 100피트 코 앞에서 문을 열자 이 작은 동네 가게는 힘 한번 못쓰고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평소 인심 좋고 친절한 김 씨 부부를 아껴왔던 카멜 마운틴 주민들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한마음으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합심해서 세사미 도넛 지키기 운동을 벌였고 크리스피 크림 오픈 날에는 ‘세사미 도넛’을 사기 위해 주민들이 몰리면서 주차장을 꽉 채우는 바람에 크리스피 크림은 장사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세사미 도넛’은 줄지어 대기해야 겨우 살 수 있을 정도로 붐볐다. 지역 언론과 방송사에서 연일 앞다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견되는 이 두 가게의 상황을 보도하면서 미전국에서 관심을 끈 이슈가 됐고 일부 한국의 방송사와 언론에서도 보도가 됐다.
김 씨 부부의 고객에 대한 친절과 관심 그리고 맛을 동네에 제공한 결과이지만 김 진웅 씨와 부인 경실 씨는 “이웃에게 받은 이때의 사랑으로 세상에 큰 빚을 졌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 진웅 씨는 84세의 고령이지만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않겠느냐” 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얻기 위해 살았던 것 같다”면서 앞으로는 ‘베풀고 나누기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 위해 당분간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1941년 생인 김 진웅 씨는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ROTC 2기로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유학의 꿈을 안고 1971년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 정치를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던 그는 당시 국제기업공사(취업이민 알선업체)가 모집한 취업 이민을 신청해 영주권을 받아 미국 땅을 밟았다. 당시에는 국비 유학 외에는 미국유학이 실질적으로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볼티모어 인근의 TOWSON UNIVERSITY에 입학해 정치학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 시 늦깎이 유학생이었던 그는 잠시 김 영삼 전 대통령(당시 야당 정치인)과 사적 인연을 맺게 됐고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한국 정계에 입문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미국에 사는 것이 한국의 정계 진출 보다도 더 좋아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항상 함께 하며 서로 위로가 되 준 김진웅, 김경실씨 부부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3년 정도 대학을 다녔으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지자, 결국 학업에 대한 열정은 잠시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됐다.
첫 직업은 볼티모어 항만의 파트타임 직원이었다. 몇 개월 간 일해 보니 트럭 드라이버가 엄청난 돈을 받는 것을 알고 뉴저지에 있는 학원까지 매일 2시간 30분 운전해 가면서 3개월 만에 Class A 운전면허를 받았다. (그는 당시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트럭 운전을 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가발 가게가 엄청난 수익을 내는 것을 보고 워싱턴 DC에서 흑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7가에 가발 가게를 열었다. 대박이었다. 장사가 잘돼 가게가 한창 돈을 벌고 있던 어느 날, 권총을 들이대며 “10일 안에 이 가게를 떠나라”는 갱들의 위협을 받고 모든 걸 버리고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에는 자전거 판매 회사 등에 투자도 하고 이런저런 사업도 벌였지만 결국 가진 돈을 다 잃어버리는 아픔도 겪었다.
1982년 서부로 옮겨와 LA에서 시민권을 받았으나 가정 불화를 겪으면서 첫째 부인과 헤어지고 실의에 빠진 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다시 시작한 일이 용접공. 소방차와 스쿨버스를 만드는 회사에서 7~8년을, 이어서 공구 생산 업체에서 5년 간 쉬지 않고 일했다.
1994년도에 샌디에이고로 내려온 김 진웅 씨는 일식당의 셰프로 일하다가 1998년도에 ‘북서관광’으로 한인사회에서 비즈니스를 다시 시작했고 이어 <안전운전교통위반자 학교(1998년)>를 개설해 15년간 운영했다. 운전 교습과 교통위반자를 위한 강의는 당시 샌디에이고에 살던 한인들에게도 큰 도움을 됐다. 샌디에이고에서 지금의 부인 김경실 씨를 만나 재혼도 했다. 김 진웅 씨는 내조에 힘쓰는 부인 김경실 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세사미 도넛’은 2022년도 Yelp가 선정한 ‘최고의 도넛 샵’으로 전국 6위에 올랐고 캘리포니아 2위를 차지했다. Brian Maienschein 주 하원의원(76th 지구, 2012~2024)으로부터 지역 사회의 우수한 업소로 표창도 받았다. 정치가의 꿈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온 김 진웅씨의 이민 여정에서 초기 한인 이민 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 전형적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김 진웅 씨가 소탈하게 새로 품은 ‘이웃에게 전해 주고 싶은 사랑’이 느껴진다.
앞으로 김 진웅, 김경실 부부가 하는 일에 웃음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사진 케빈 정